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문단 편집) === 남베트남의 대혼란 === [[미국]]은 본래 베트남 지역의 독립에는 찬성이었지만 베트남이 공산화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넘어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화 되고 결국 미국마저 공산화될 것이라고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6.25 전쟁]]이 정전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6.25 전쟁]]은 종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땐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었는데 이때 베트남이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가 떠난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이 정책을 주장했던 사람 중 한 명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나중에 ''아무래도 그때 우리가 좀 미친 것 같았죠.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지레 겁을 먹은 겁니다." 라고 회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미국]]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2차 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름 서방진영에서 구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베트민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압제자 프랑스를 지원하는 명백한 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비시 프랑스]]/[[일본 제국]]이 베트남을 통치하던 시절에 [[OSS]]를 통해 [[호치민]]과 베트민의 독립 투쟁을 지원해 주었던 국가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에도 호치민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어야 꿈에도 그리던 베트남 독립을 이룰 수 있고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호치민은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힘에 대해서 두려워 했고 후일의 통일 베트남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식민지 해방전쟁과 동급으로 여기진 않고 남베트남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해석한 걸 보면 미국과 프랑스는 확실히 구분한 듯하다. 호치민은 2차 대전 때의 동맹관계를 떠올려서인지 미국의 [[해리 S. 트루먼]]에게 지지를 호소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그 자신과 자신의 당인 [[베트남 공산당]]이 30년대 이래로 쭉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신뢰가 얻기 힘들어서 말 그대로 헛된 기대일 뿐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의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스트 세력에 대한 탄압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https://gall.dcinside.com/m/war/1811863|올라간다]]. 호치민은 그에게 붙은 일종의 '성자 신화'가 말하는 것처럼 같은 민족은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 순수한 인물이 절대로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상적인 다원주의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든요소를 총동원했으며 수틀리면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정치적 괴물이자 독재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독립 이전부터 말이다.[* 사실 공산주의가 현실에 정착하게 된 사건인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나를 보면 이후 세계 각지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이처럼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성향을 띄는 것은 필연적인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늦어도 1947년에는 이런 사정을 전부 파악하고 있던 걸로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7v06/d138|보인다]]. 베트남에서 독립운동 세력은 베트민만 있던 게 아니고 북쪽에는 베트남 국민당(VNQDD)[* 사실 베트남 국민당은 이전에 베트민과 교류했던 것을 통해서 1946년 베트민이 주도하던 연립정부에 참여하였지만 얼마안가 베트민의 견제와 뒤이은 탄압과 숙청으로 인해 오래 못 갔다. 이후 친불파와 베트민에 시달리다가 제네바 협정 후 남베트남 정부에 합류하여 자매정당이던 대월국민당과 함께 야당으로써 활동하였으나 끝내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한계로 인해 소수정당에 머물렀고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나 대월당, 남쪽에는 종교파 세력 같은 다른 세력들이 즐비했다. 이들 대부분이 2차 대전 때는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처럼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원리로 일본군과 협력했기에 미국의 편이 아니긴 했으나 종전 이후로는 이미 일본은 망했고 이들 비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더 이상은 미국의 적이 아니었다.[* 또한 프랑스 역시 찬드라 보스의 부하들을 체포해서 재판에 넘겼던 영국 당국과는 달리 종전 이후에는 이러한 반공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으로 대했던 편이다.] 이런 대체제들이 있던 마당에 철저한 독재정권으로 확인된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을 미국이 지지할 만한 이유는 단 1도 없었다. 황제가 경찰권을 군벌과 폭력단에게 공식적으로 팔아넘겼다고 할 정도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되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에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정부에 저항하는 폭력단 빙쑤옌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 80만에 달하는 피난민의 재정착을 완수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집권 1년도 지나지 않아 정치적 동맹 세력들을 배신하고 숙청하는 북쪽의 베트민이 10여년 전에 저질렀던 짓과 별로 다를 바도 없는 일을 저질렀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본인도 군사적으론 무능했기 때문에 지엠에게 배신당한 종교파 세력이 가진 군사조직이 와해된 상황에서 공화국 정규군이 이들 지역을 장악하는 데도 실패해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결국 몇 년 뒤 베트콩의 침투가 본격화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정치적으로도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되었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담배|양담배]] 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뉴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켰다. 말그대로 "신악(新惡)이 구악(舊惡) 뺨친다"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막장성으로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도로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는 공산당의 세력화를 불러왔다. 1960년 12월에는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 와중에 [[남베트남]]에서는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 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남베트남 사람들은 이 반부패 운동에 참여하는 데 좌, 우익을 가리지 않았다. 목사, 승려, 학생 등 남베트남 국민들은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문제는 당시 국가 상황이 여러 면에서 최악에 가까워지고 있어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서로 반목하다 급기야 서로를 향해 테러와 암살을 행했다.'''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 지도자 웬반홍, 사이공 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었다.] 반대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좌익 인사도 사실상 마찬가지였는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관변단체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좌익이나 우익이나 똑같은 놈들로 보일 뿐이고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라를 좀 평화롭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사이공의 대학생들도 초기에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견지했으나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자 결국 나라를 버렸다. 온 나라가 [[불교]] 신자, [[가톨릭]] 신자, [[사회주의]]자, 자본주의자, 극좌/극우 등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끊임없는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남베트남은 국가 내부의 부패가 심각해지며 내부 불만이 심화되어 치안이 악화되었고 좌익과 우익은 이념적 유혈갈등을 마구 일으켰으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마구 반목하며 남베트남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부패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도를 공공연하게 탄압했다. 물론 불교계도 부패했고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천여 년이 넘도록 불교를 많이 믿어 온 베트남 여론은 이런 탄압을 환영하지 않았다. 국교나 다름없는 불교를 탄압하곤 정작 가톨릭을 내세우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니 이런 여론의 분노를 지지삼은 남베트남 불교계는 남베트남 지엠 정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쟁이 심화되며 사람들이 마구 죽어가기까지 해 극도로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불교계는 이미 남베트남이라는 국가에 소속된다는 소속감도 잃어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불교계 군벌 및 장교들마저 응오딘지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으며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 주요 도시가 차례차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징병 반대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병 징집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불교도 시위가 이렇게 격해지며 [[경찰]]로는 감당조차 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판국에 이르렀음에도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탓이라는 헛소리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 불교도 시위 와중에 저명한 [[승려]]인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이 광경을 촬영한 사진이 미국 랩 메탈 그룹 [[Rage Against The Machine]]의 데뷔 앨범 표지로 쓰이기도 했다.] 결국 군부에서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거론하기까지 했는데 대통령 [[영부인]] 역할을 하던 응오딘지엠의 제수(응오딘누의 아내) "마담 뉴(Madame Nhu)" 쩐레수언이 베트남의 고승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건을 두고 '''불타게 놔두고 박수나 칩시다(Let them burn and we shall clap our hands)"'''라고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중들이 바베큐를 더 한다고 하면, 제가 기쁜 마음으로 휘발유와 성냥을 지원할게요(if the Buddhists wish to have another barbecue, I will be glad to supply the gasoline and a match.)"라고 했다.[* Tragedy of Vietnam, Patrick J. Hearden, p83] 또 "중놈들이 한 게 뭐 있나요? 기껏해야 자기네 하나를 [[바베큐]]로 만든 게 고작이죠... 그 바베큐요? 자기 만족일 뿐이죠, 게다가 수입 휘발유를 썼잖아요"라고 했는데 이 막말은 미국 [[CBS(미국 방송)|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위에서 보듯이 영어 자막을 달고 미국에서도 방송되었고 이 막말을 본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황당해했다.[[https://youtu.be/d_PWM9gWR5E|#]] 원래 [[베트남]]은 [[불교]]가 국교이다시피 할 정도로 국민들의 상당수가 독실한 불교도인 나라다. 이런 곳에서 집권 세력이 종교적 편견에 찌들어서 불교를 맹목적으로 탄압하고 비하하면서 극소수인 카톨릭 교도들에만 온갖 이권을 안겨주니 당연히 온 국민이 분기탱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소신공양]] 사건 1달 후인 1963년 11월 미국의 방관 하에 쿠데타가 발발해 응오딘지엠은 동생과 함께 가톨릭 성당으로 숨으려다 체포, 사살당했다. 쿠데타 세력 내에서도 응오딘지엠의 처리에 관해서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해외 추방으로 의견을 모아 지시를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사살당한 뒤였다. 이에 어쩔 줄 몰라하던 군부는 [[미국]]에 응오딘지엠이 자살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쩐레수언은 그 때 딸과 미국에 있었고 다른 자식들이 먼저 로마로 망명하여, [[로마]]로 따라가 살다가 병사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조국에서 죽게 해 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의 1막에 불과했다. 지연, 학연, 종교와 미국과의 연줄로 분열되거나 난마처럼 얽힌 남베트남 군부는 갑자기 손에 떨어진 권력에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지엠 정권 추종자를 모조리 축출한 정치 공백에 권력의 맛을 본 군인들의 야욕에 의해 '''쿠데타가 쿠데타를 부르는 막장'''에 빠진다. 이때부터 1975년까지 무려 다섯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와중에 응웬 까오 끼 전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종교인들은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 더 이상의 북베트남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쿠데타와 부패가 횡행하고 우익, 좌익 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대놓고 정부를 부정하는 시위들이 벌어지는데 정부는 손놓고 있고 간첩과 게릴라([[빨치산]])들이 영토 내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